요즘은 정말 바쁘게 살고 있어서 통 주위사람들과 연락을 못하다가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나 나나 서로 졸업을 앞두고 있고 진로 문제때문에 고민이 많아서 항상 만나면 말이 잘 통했다. 사실 이십대 중반을 살다보면진로 문제 뿐만 아니라 남자문제로도 고민을 하게 되고 뭐 이런 저런 고민이 많다. 그 친구와 만나면 항상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의 삶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고 세상적인 가치에 휘둘리다 보면 끝도 없다는 우리의 공통된 의견이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나중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내 손목시계를 보더니 괜찮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매우 뿌듯했는데, 그럴만했다. 안그래도 나는 한참이나 시계가 갖고 싶었고 몇달째 나에게 어울리는 시계를 찾아헤맸다. 나는 몇번의 경험과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시계에 대한 확고한 취향을가지게 되었는데, 물론 시계는 언제나 선물받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취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 없었던 것도 시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먼저 시계의 줄은 얇아야한다. 메탈은 차갑고 무겁기 때문에 섬세한 여성의 손목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시계는 가죽이지만 줄이 무척 두꺼웠는데, 익숙해지기 전까진 제대로 차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고 심지어 아름답지도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쓰시던 시계를 물려주신 적이 있는데 무척 좋은 시계였지만 체인이 메탈이었고 왠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목에 착 감기지 않는 메탈의 느낌이 별로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머니께서 또 다른 시계를 물려주시게 되었는데 그 후로 나의 미적감각은 그 시계에 모두 쏠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다. 얇은 가죽줄에 시게는 금장이었고 시계 줄의 가죽은 갈색이어서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였다. 하지만 몇 년이나 시계를 차고다니다 보니 가죽 줄은 끊어지게 되었고 나는 새로운 시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두 번째 조건은, 시계를 봤을 때 시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찰 시계는 반드시 초침이 있어야한다. 이런 조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시간을 확실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다. 나는 하루의 계획을 시간 단위, 분단위로 계획하는 편이고 대체로 정확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데 익숙해져야 확실하게 쉴 휴식시간까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리를 빼곡히 기록하고 메모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추가하는 일이 즐겁다. 그러니 항상 시계가 손목에 있고, 돌아다니면서 정확히 시간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는데 이왕 시계를 산다면 돌아가는 초침을 보면서 차분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더 할 나위가 없을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초침을 보면서 곡의 빠르기를 계산하기 위해서다. 일종의 메트로놈으로 볼 수 있는데, 곡의 빠르기에서 ♩=60은 1분에 4분음표가 60번 나온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휘를 하거나 악보를 읽을 때에 시계를 보고 곡의 빠르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80은 3초에 4분음표가 4번 나온다. 그런식으로 계산하면서 빠르기를 알수 있다. 손목시계에 12개의 숫자가 모두 표시되는게 아니더라도 시간을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초침이 있는 시계가 좋았다. 세 번째 조건은 가격이다. 정말 농담이 아니고 이건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사실 명품에는 관심이 많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료 수집이나 미적 감각을 충족하려고 잡지를 찾아보고 디자이너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수준이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명품을 들고 다니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기본적으로 20대는 명품 가방을 들고다니지 않아도 아름다운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딱 5년만 지나더라도 내가 아이찜 백팩을 매고 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어쩔 수 없이 - 정말 어울리지 않아서 - 토드백을 매고 아무리 무거워도 (등산을 갈 때가 아니라면) 차마 백팩을 무자비하게 매고 다닐 수는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나이에 걸맞는 품위가 필요하다. 사실은 지금도 운동화에 아이찜 백팩을 매고 나가면 아버지께서 속상해하신다. 하다못해 아이찜은 매고 나가지 말아달라며, 다른 가방을 산다면 아버지는 행복할거라고 말씀하시는데 아이찜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매고 다녔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꼴보기 싫으실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다른 가방을 사는걸 번번히 잊어버리기도 하고, 아이찜이 무척 편하기도 해서 피곤할 때에는 종종 학교에 아이찜 백팩을 매고 나간다. 이젠 10년이 넘은 회색 아이찜이 귀엽게 보이기까지한다. 이제 주위 사람들은 아이찜을 매고 나타나도 그냥 웃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그럴땐 내심 뿌듯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괴팍한 사람이 된 기분이긴 한데 정든 아이찜 가방이 없으면 이젠 섭섭한 정도다. 이 아이찜 가방, 서른이 지나서도 매고다닐 수 있을까. 나에게도 소셜포지션이 있을텐데, 정장을 입고는 절대 아이찜 가방을 매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면 즐길수 있을 때 즐기자는 생각이 든다. 시계를 처음 갖고 싶어서 백화점에 갔을 때에 점원분께서, 나의 (아마도) 고상하고 시크한 표정을 보고 붙잡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시계가 있다며 번쩍번쩍 빛나는 시계를 하나 소개시켜주셨다. 1000만원이었다. 다이아몬드로 뒤덮인 시계였다. 사실은, 저런건 절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왕 처음 진지하게 고르는 시계는 내 능력으로 사고 싶어서 저렇게 비싼 시계는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더욱더 시크한 표정으로, '흠...'하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그 옆 직원분께서 다른 시계를 보여주셨다. 신상이라며 보여준 시계는 700만원이었다. 당황스러웠다.전혀 티는 안났겠지만 당황했다. 나는 새침하게, 저는 초침이 있는 시계가 좋아요. 하며 옆 쪽으로 도망갔는데 다른 직원분이 나를 붙들고 이쪽 시계는 활동성이 좋다며 시계를 권해주셨다. 500만원이었다. 뭐지. 그리고 열심히 백화점을 둘러봤는데 80만원보다 싼 시계가 없었다. 그렇게 쓸쓸하게 퇴장한 것이 두 달 전이었다. 정말 나에게 맞는 시계는 세상에 존재하지않는 것인가. 그렇게 손목시계에 대한 일이 잊혀져 갈때 쯤, 어떤 선배랑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를 하던 중에 손목 시계에 눈이 갔다. 선배는 무척 클래식한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내가 넌지시 물어보니, '이건 못 줘. 비싼거라서. 누나가 사줬거든.' 선배는 내심 누나가 스위스에서 사준 시계라는 것과, 비싼 시계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계를 탐낸 적도, 그 선배에게 뭔가를 요구한 적도 없는데 그 선배의 의해 졸지에 날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자식이... 짜증이 났지만 그러려니 했다. 시계가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시계 하나에 저런... 슬퍼졌다. 정녕 아름답고 멋진 시계는 고가여야만 하는걸까. 브랜드가 대체 무엇일까. 우울해하며 근처 백화점에 놀러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주 구석진 곳에 시계 매장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나를 붙잡고 1000만원이니 400만원이니 하던 시계 매장과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내가 발견한 매장은 유난히 비상구 옆에 찌그러져 짜져있었다. 뭔가 모를 호기심에 구경하니 딱 봐도 500만원처럼 보이지는 않는 시계들이 몰려있었다. 시계들을 바라보다가 시계 줄이 무척 얇고 클래식하게 생긴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저건 40만원 정도는 할 것 같아... 덜덜 떨며 시계를 내려다봤다. 내가 한달동안 과외를 해서 버는 돈이 40만원인데 딱 한번 40만원짜리 물건을 산 적이 있다. 어머니 생신이 다가올 때 백화점을 지나가다가 본 가방을 사드린 일이 있었다. 가방 매장을 지나가면서, 어머니도 사회적인 위치가 있으실텐데 그냥 들고 다니는 가방이 저정도는 되야 하지 않나 싶어서 체크카드를 박박 긁었다. 어머니는 가방을 받자마자 매우 기뻐하셨지만 결국 반나절만에 백화점에 와서 환불하고 돈을 돌려주셨다. 니가 힘들게 번 돈인데 이렇게 한번에 올인해서야 되겠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왠지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서 슬프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묘했다. 그랬는데 내가 아무리 나만의 시계를 구한다지만 40만원짜리 시계를 살수는 없지 않나 싶어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직원분이 다가와서, 손님 그 시계는 15만원입니다. 하고 말하는게 아닌가. 조금 놀랬다. 사실 시계가 마음에 꼭 들었기 때문이다. 시계 줄도 얇고 초침도 있었다. 왠지 이 시계를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보면 볼수록 시계가 나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 들었다. 이년아. 이건 기회야. 맞아. 이건 기회같아. 난 널 가지겠어. 아이원츄. 아이니쥬. 그리고 나는 20대를 나와 함께 할 친구를 얻게 되었다. 사랑해 손목시계. 여차저차하여 나는 시계를 만나게 되었다. 정말 진물나게 끼고다닌다. 손목시계가 없으면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든다. 어릴 때에는 손목시계따위 줘도 안꼈는데 나도 나이를 먹었나보다. 역시 손목에는 시계가 있는게 간지다. (사실 핸드폰으로 시간 확인하는거 정말 귀찮았다.) 시계 이야기를 하면서, 나이가 어릴 때에는 굳이 명품에 구애받지 않고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도 무척 공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 나이야 청바지에 코트만 걸쳐도 번쩍번쩍 빛이나고, 얼굴에 썬크림 하나 발랐을 뿐인데 뽀얀 피부가 백옥같은 때가 아닌가. 왕후의 자리를 내 놓으시지요. 그런 화장품 안써도 된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젊음 그 자체가 아니다. 명품도 아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집 자식도 20대에는 똑같다. 내 친구중에 천재가 한 명 있다. 나보다 두 살 어린데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뉴욕 콜롬비아 대학원에 입학해서 미국으로 슝 떠난 친구다. 물리를 사랑하는 아이. 근데 그래봤자 그 천재도 지금은 대학원생에 불과하다. 대단하긴 한데, 아직 우리는 그렇게 대단히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돈 많은 집 자식들도 별로 부럽지 않다. 그 친구들이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좋은데 그 친구들이나 나나 아직 대학생 신분인 것은 비슷하다. 우리의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10년 후다. 10년 후에 어떤 사람은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장님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나는 10년 후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곡가가 되어있으면 좋겠다. 그 때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브레인이 되고싶다. 어떤 사람은 그 때도 별 볼일 없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리고 돈이 아주 많은 집 자제분도 손목에 500만원짜리 시계를 찰 자격은 없다. 걸치고 있는 옷이 1억이 넘어도, 그에게는 아직 그것을 가지고 있을 가치가 없다. 이유도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가치. 미래를 향한 끊임 없는 준비와 노력, 그리고 그것을 향해 달릴 투지와 야망이 우리의 insight를 만든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내가 이런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가 얼마짜리인지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간파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린왕자가 말했다. 중요한 것들은 항상 보이지 않는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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